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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헨지는 누구의 작품인가? (스톤 헨지에 대한 해석)쭉이의 취미/미스터리 분석 2020. 3. 2. 11:04
스톤 헨지는?
환상열석유적이라고 부르는 영국의 스톤헨지(고대 앵글로색슨어로 ‘공중에 매달린 바윗돌’이란 의미)는 그 특이한 구조 때문에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건설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돌을 위미하는 ‘스탄(stan)’과 돌쩌귀를 의미하는 ‘헹그(hencg)’라는 고대 영어 단어에서 유래한 말인 스톤헨지는 헨리 시대보다 수백 년 앞서 영국을 정복한 색슨족이 이름 붙인 것이다.
영국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는 높이 4미터, 무게 25~30톤의 거대한 돌을 원형으로 늘어놓은 거석유구다. 스톤헨지는 선사시대의 입석유적들 중에서도 아주 특이하다. 예컨대 돌기둥들의 윗부분에 가로로 놓인 거대한 상인방 돌들은 똑바로 잘라낸 단순한 평석이 아니라 돌 하나하나를 곡선으로 잘라 만든 것으로, 이들을 위에서 보면 원주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
돌기둥들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처럼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게 되어 있는데 분명 원근법의 영향을 감안하여 밑에서 올려다볼 때 기둥이 직선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 이유로 안쪽의 상인방 돌들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게 깎여 있다. 스톤헨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인돌과 같이 거석유물로 분류하지만 그리스 신전과 같이 중앙 집중적인 배치방식으로 공간을 한정했다는 점에서 건축물로도 간주할 수 있다.
스톤 헨지에 대한 가설
17세기 초 제임스 1세는 스톤헨지를 보고 흥미를 느껴 건축가 조운즈에게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조운즈는 스톤헨지에서 로마식 설계양식과,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식 기둥 배치방식을 확인했기 때문에 고대 로마인이 스톤헨지를 건설했다고 생각했다. 옷을 걸치는 것조차 잘 몰랐던 야만인인 고대 브리튼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보기에는 스톤헨지의 건축양식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1665년 존 오브리는 스톤헨지를 드루이드 승려들이 건설한 성소라고 했다. 드루이드 승려들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인 기원전 14~13세기에 나타나 고대 프랑스 · 영국 · 독일 등지에 널리 퍼져 있던 켈트인의 종교를 관장하던 신관들이었다. 물론 이 주장은 스톤헨지의 건립 연대가 이보다 2000년이나 앞선다는 것이 알려지자 설득력을 잃었다.
스톤헨지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은 이집트 고고학 발굴의 선구자인 플린더스 피트리(Flinders Petrie, 1853~1942)에 의해 시도되었다. 1877년 그는 스톤헨지의 돌들을 측정해 그 위치를 2.5밀리미터 오차한계 내의 약도로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스톤헨지의 돌기둥들이 태양의 특정한 위치에 따라 배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건설 시기가 730년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연대는 색슨족이 건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학자들은 즉각적으로 그의 주장을 거부했다.
이 후 학자들은 이 놀라운 구조물이 왜 건조되었는지 규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스톤헨지가 방어를 위한 성채도 아니고 거주 공간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곳에서 생활한 흔적이 없다는 것은 토기의 파편 등 거주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의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으로도 증명된다.
스톤헨지는 1901년부터 노먼 로키어(Norman Lockyer, 1836~1920)에 의해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로키어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과학잡지 중 하나이고 노벨상의 산실인 잡지 ‘네이처’를 창간했고 ‘네이처’의 편집자이자 태양물리학연구소 소장이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와 이집트 사원들의 천체 정렬 현상을 연구한 뒤 이집트 신전들이 하지 때의 별의 배열에 맞춰 건축되었다고 1894년 ‘천문학의 여명기’을 통해 발표했다. 당시 이집트 학계는 그의 주장에 회의를 표명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톤헨지의 비밀을 규명하는 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로키어는 하지에 떠오르는 태양의 첫 광선이 스톤헨지의 중심선과 정확히 일직선을 이루며 이 직선을 스톤헨지 밖으로 계속 연장하면 그 한쪽은 실베리힐에, 다른 한쪽은 디치즈성에 다다른다고 발표했다. 그는 대다수 조사대상 유적들의 일차적 기능이 무덤이나 제단이 아니라 세시(歲時)관측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로키어에 의하면 스톤헨지 같은 기념물들은 달력상의 중요한 날의 일출이나 일몰 또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한 선을 기초로 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대 인류가 경제뿐만 아니라 종교 · 의술 · 미신 등 일상사 전반의 가치관을 지도받았던’ 천문학자, 즉 사제계급이 존재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결론에 대해 고고학자들은 한마디로 소설이라고 반박했다.
돌 자체에 초자연적인 힘이 내재한다는 믿음, 혹은 돌에 조상의 영혼이나 신령 등 영적인 존재가 강림한다는 생각에서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프레셀리 지방에 병을 고치게 하는 샘들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고대의 성지 참배자들이 방문하는 순례지였을 것이란 얘기도 있다. 또 장례식을 치르는 장소였다는 주장과,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원 문제도 한몫을 거들었다. 스톤헨지가 만들어졌을 무렵 그리스의 동쪽 지방은 이미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접어들 때였다. 청동으로 도구를 제작할 때는 주석을 꼭 섞어야 한다. 주석의 주요 산지 중 하나가 영국 남부에 있는 콘월반도였다. 당시 이집트나 그리스의 상선들은 스페인 · 프랑스 북부 · 영국 · 아일랜드 방면으로 항해를 했고 특히 그들이 무역을 활발히 했던 곳에는 거의 모두 거석들이 세워져 있다. 당시의 상인들이 원주민들에게 거석을 건설하는 기술을 알려주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주석을 구하려는 상인들이 원주민들에게 거석을 쌓는 방법을 알려주어 스톤헨지가 건설되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스톤헨지 근처에서 300개 이상의 선사시대 분묘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수는 영국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다. 농경사회에서 인구가 증가해 사회를 조직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지배계급에서 이 같은 거대 구조물을 통해 사회를 결속시켰다는 설도 있다.
유럽의 거석 기념물 건설이 기원전 1400년경부터 갑자기 중지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학자들도 있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번영한 미노아문명이 붕괴되었고 기원전 1200년경부터는 ‘바다의 민족’이 유럽에 침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대사건으로 인해 이집트를 포함한 지중해 지역 사람들이 기념물 건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스톤헨지의 구조를 볼 때 천문학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스톤헨지가 제사 등 의식을 치르던 곳이라고 추정한다. 초기 목조 건축물 단계에서는 유물의 중심부에 목재를 원형으로 세워 중심부로 일반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통제했다. 이 유적의 심장부에서 바깥을 바라볼 수 있었던 소수의 특권층은 태양이 하짓날 아침 진입로 위로 뜨는 순간이 1년 중 가장 중요한 때임을 인식하고 감격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2003년에 발표된 스톤헨지의 수수께끼에 대한 새로운 가설도 주목거리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앤서니 퍼크스는 ‘스톤헨지: 의학적 견해’라는 논문에서 스톤헨지를 건설한 사람들에게 있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탄생과 죽음이었다며 스톤헨지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여성의 성기와 뚜렷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청석으로 쌓은 내부의 원은 소음순, 그 둘레에 사르센석으로 쌓은 큰 원은 대음순, 가운데 제단석은 음핵이며 중심부의 터진 통로는 산도를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퍼크스는 스톤헨지와 이웃한 우드헨지에서 발견된 희생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어린이의 유해는 이 같은 이론을 뒷받침해준다고 주장했다. 고대사회에는 대지의 어머니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스톤헨지를 만든 사람들에게 어머니 대지는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동식물을 낳는 산도를 뜻했다는 것이다. 스톤헨지는 한동안 지역 족장들의 매장의식을 거행한 곳으로도 알려졌고 다산을 기원하는 상징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스톤헨지가 원뿔 모양의 거대 건물이었다는 가설이 있다. 퍼즐연구가인 브루스 베들럼은 스톤헨지가 원뿔형 건물로 만들어졌다며 나무와 타일을 이용해 원래 모습을 복원한 모형을 공개했다. 브루스에 따르면 스톤헨지의 원형 건물은 햇빛이 10개의 문을 통해 내부로 비쳐들어 내부가 하루 종일 밝은 조명을 유지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됐다. 지붕은 들보로 떠받쳐진 구조로, 각각의 들보는 중력에 의해 지탱되며 음향학적 측면에서 완벽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남아 있는 30개의 열석은 외벽을 감싸고 있는 기둥으로, 그는 스톤헨지가 종교적 용도의 건물이라기보다는 주요한 정치적 결정이 이뤄지는 권력자들의 건물에 더 가깝다는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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